우리나라 드라마 제작의 실태... 생각해보면 좋을 글..
CSI 시리즈는 2000년대 미국 드라마의 상징이었다. 라스베이거스를 배경으로 한 CSI가 2000년 처음 나온 뒤 마이애미·뉴욕 과학수사대의 활약상을 담은 연계 시리즈(스핀오프·Spin Off)가 잇따라 큰 성공을 거뒀다.
'CSI' 시대는 저물고 있지만 성과는 컸다. 형사의 직관과 투지에만 의존하던 수사물은 과학과 증거에 대한 천착을 통해 시청자에게 새로운 관점과 취향을 제시했다. 비슷한 장르의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윤리적 추론 대신 합리적 증명이 단죄(斷罪)의 기준이 됐고 다른 장르에서도 '디테일이 곧 리얼리티'라는 집착이 유행했다. 이는 수년에 걸친 치밀한 기획으로 시리즈의 철학적 기반까지 마련해 방영 시작 전에 전편(全篇)을 완벽하게 만드는 제작 방식이 빚어낸 결과였다. 각 시리즈는 작가만 10여명이고, 상시로 자문에 참여하는 전문 기관도 800여개에 달한다.
이에 비해 한국 드라마계의 현실은 안쓰럽기만 하다. K팝이 전 세계를 휩쓰는 사이 한류(韓流)의 중심이었던 드라마의 위세는 많이 꺾였다. '겨울연가' '대장금' 이후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대형 히트작은 찾아보기 힘들다. 불어난 자본에도 변함없는 주먹구구식 제작 행태가 이런 퇴행의 근본 원인이다. 첫 방영일을 코앞에 두고도 편성이 결정되지 않고 방송 당일까지 작가로부터 날아오는 '쪽대본'에 의지해 촬영이 이뤄진다. 최근에는 시청 흐름을 깨는 간접광고가 난무하고 배우 출연료도 제대로 주지 못해 연기자 노조가 파업까지 벌이고 있으니 드라마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나 철학을 기대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상황이 돼버렸다.
요즘 '드라마의 제왕(帝王)'이란 미니시리즈가 화제다. 황당하고 비상식적인 드라마 제작 행태를 적나라하게 그리며 시청자를 몰입시킨다. 한국에서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이 그만큼 드라마틱하다는 얘기다. 드라마가 시청률을 위해 혹독하게 자아비판을 벌이는 상황은 기막힌 역설이다. 그리고 이제는 좀 달라질 때도 됐다는 자체 경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