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앞둔 연인의 사소한 다툼은 엄청난 참사를 불렀다. 이 살인사건으로 남철웅(손호준)은 약혼녀 강유신(서예지)을 잃었고 자책으로 10년을 흘려 보냈다.
이 사건 현장의 중심에 있는 이상원 형사(성동일)는 평생을 지고 가야할지도 모를 비밀을 가지게 됐고 어린 기정(김유정)은 엄마를 잃었으며 정현으로 살게 됐다.
묘한 눈빛으로 만취해 잠든 아빠 상원에게 총을 겨누는 정현, 첫 만남에서 그런 정현의 목을 조른 철웅의 눈빛은 오롯이 ‘복수’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비
극적인 사건으로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들은 구원이나 용서 보다 처절한 복수를 이야기하죠. 하지만 아무 것도
못하고 자신을 파괴하면서 살고 있어요. ‘복수하겠다’, ‘죽여버리겠다’고 말은 하지만 아무 것도 못해요. 복수도 용서도.”
남겨진 사람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는 공동연출자 이동하 감독의 말처럼 철웅, 상원, 정현은 10년 동안 복수와 자책의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제
가 연기 변신이 없는 배우임을 인정합니다. 촬영이 끝나도 역할에 빠져 괴롭다고 하는 배우들도 있지만 저는 그러지 않습니다.
캐릭터에 제가 빠지는 게 아니라 캐릭터가 곧 성동일이 되죠. 유정이랑 부딪히는 신도 굳이 연기를 안해도 연기가 되는 것 같았어요.
유정이도, 호준이도 눈빛이 좋아서 편하게 연기했죠.”
원래 시나리오 상 무자비하고 냉철한 캐릭터였던 상원은 연기자 성동일을 만나면서 유쾌하고 편안해졌다. 상원과 정현은 더욱 다정한 부녀처럼 보였고 그래서 남겨진 두 사람이 과거를 딛고 또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은 현실처럼 느껴진다.
가장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마음이 병들어 있는 캐릭터 철웅은 착하고 밝은 이미지의 손호준이 대본 분석 후 가진 미팅에서의 첫마디로 신뢰를 얻었다.
“약혼녀를 국도변에 버리고 온 것, 그게 시작 아닌가요?”
그래서 철웅은 스스로를 용서하지도, 살인자의 딸 정현에 대한 제대로 된 복수도 하지 못한다. 철웅과 더불어 극 중 눈에 띄는 인물은 유신의 부모(남일우, 이경진)다.
처
음엔 유신을 국도변에 버리고 갔다는 사실을 알고 철웅에 대한 원망으로 울부짖었다. 살인자 신지철(임형준)이 사형으로 죽기 직전까지
면회를 신청해 이유를 묻고자 했지만 결국 대면하지 못했다. 그리고 함께 춤을 추러 다닌다며 철웅에게 “잘 지내고 있다”고 사람
좋게 웃던 두 사람의 모습은 때때로 부자연스러웠다.
기
숙학교를 다니는 정현과 범인 잡는 일에 혈안이 된 상원 역시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늦게까지 돌아다니는 사춘기 딸에게 수갑을
채우며 밥 한끼라도 같이 먹으려 애쓰는 아빠, 툴툴거리면서도 살가운 딸. 일상처럼 자연스러운데 그들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밝고 캔디 같은 이미지를 주로 연기했던 김유정은 “내 안에서 어두운 내면을 끄집어 내고 싶었다”며 “정현이는 굉장히 밝고 명랑하지만 외롭고 어두운 면도 많은 캐릭터다. 조금씩 외롭게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성동일과 김유정은 극중 상원과 정현의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했겠냐는 질문에 대한 답도 진지하게 털어놓았다.
김
유정은 “정말 감당하기 힘든 상황들이다. 실제로 정현과 같은 나이라 더 공감할 수 있었다. 영화 속 현재 보다는 ‘커서 어떤을
직장 가지고 살아갈까’ 미래를 많이 생각했다”며 “내 (실제) 성격이라면 멀리 떠나서 살 것 같다. 여행하면서. 아픔이 잊혀 지진
않겠지만 아픔을 간직하면서 나만의 것을 만들어가면서 성장할 것같다”고 밝혔다.
성동일은 상원이 정현을 데려다 키우는 선택에 대해 “결혼도 안하고 사는 걸로 나오는데 나는 그렇게 싶지 않다. 나라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 지만 등장인물들은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사연을 가지고 있어요. 모두가 피해자죠. 피해자라는 의식을 떨쳐버리기 위한 행동이 세서 그렇지 결국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요. 저희 영화는 모든 사람들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해소하고 위로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함께 가기 보다는 각자의 위치에 서서 가는 거죠.”
영화 ‘비밀’에 반전은 없다. 화려한 캐스팅도, 애절한 로맨스도, 최첨단 기술도, 긴박감 넘치는 서스펜스도 없다. 하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을 자신의 사연을 떠올리게 하는 여운이 있다.
더불어 때론 철웅이고 때론 상원이기도 하며 또 때론 정현이기도 한 자신 혹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묵직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가슴과 어깨를 짓누르는 희한한 경험을 선사한다.
영화의 메인 카피는 ‘우리는 다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지만 어쩌면 이는 ‘꼭 다시 만났어야 했다’는 역설적 표현처럼 느껴진다.